국내 탐방/문화유적, 고택들 58

태조 왕건을 구한 신승겸장군 유적지..(19)

신승겸장군 유적지.. 고려 태조 10년(927) 신라를 침공한 후백제 견훤의 군사를 물리치기 위해 왕건과 함께 출전하였는데 왕건이 이 곳 공산싸움에서 후백제군에 포위되어 위기에 빠지자 왕건의 옷을 입고 변장하여 맞서 싸우다 전사하였으며 왕건은 그 틈을 이용하여 홀로 탈출하였다고.. 왕건은 장군의 죽음을 애통히 여겨 그의 시신을 거두어 지금의 춘천인 광해주에서 예를 갖추어 장례를 치루고 신숭겸이 순절한 이 곳에 순절단과 지묘사(미리사)를 세워 그의 명복을 빌게하고, 토지를 내려 이 곳을 지키게 하였다고 한다.. 1607년(선조 40)에 없어진 지묘사 자리에 경상도 관찰사 유영순이 서원인 충렬사를 세워 장군을 모셨으며 1871년(고종 8)에 서원철폐령으로 표충사가 없어진 뒤에 후손들이 재사를 지어 이 곳을 ..

1899년 건립된 이장우 가옥..(17)

이장우 가옥.. 광주광역시 남구 양림동에 있는 19세기말 주택으로 대문간, 곡간채, 행랑채, 사랑채, 안채가 배치된 상류주택 양식의 기와집.. 이 중 안채가 광주광역시 민속문화재 제1호로 지정되어 있고 동서로 길게 늘어선 축에서 약간씩 빗겨나며 대문간, 곡간채, 행랑채, 안채가 배치된 상류주택 양식의 기와집이다. 안채의 상량문에 “광무 3년 을해 2월”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1899년에 건축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건립 당시의 소유자는 정병호(그의 부친은 정낙규)인데 1965년 현 소유자 이장우가 사들였다. 자료 : 이장우 가옥 [李章雨家屋]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탐방일자 : 2016/11/11

호랑이도 감동한 효자! 도시복 생가..(7)

도시복 생가.. 경상북도 예천군 상리면 용두리 효공원 내에 있었는데 조선 후기 철종 때의 효자로 이름난 도시복(都始復, 1817~1891)의 생가로 원래 재래식 'ㅡ'자형 초가였으나, 1882년 어사 이도재의 정려 표창 상신이 있은 뒤 'ㅁ'자형 초가로 증축하였다고 한다.. 1970년대에 초가지붕을 슬레이트로 개조하여 사용하던 것을 유교문화권 개발사업의 하나로 2005년에 생가로 복원하였다고.. 자료 : 도시복 생가 [都始復生家] (두산백과) 탐방일자 : 2016/11/09 도시복은? 도시복은 조선 철종 때 사람으로 본관은 성주이며, 호는 야계(也溪)이다. 용두리 야목마을에 살았는데, 마음가짐이 어질고 효심이 극진하였다. 장날이면 나무를 팔아 어머니를 봉양하였는데, 어느 장날 늦게 어머니상에 올릴 생선을..

경북 예천군 연안이씨별좌공종택..(16)

연안이씨별좌공종택 (延安李氏別坐公宗宅).. 경북 예천군 호명면 사고막골의 야산을 배경으로 정남향으로 자리잡고 있는 건물로 비탈진 대지 위에 정침이 있고, 동쪽 담장 밖에 흙담장을 쌓고 사당을 별도로 세웠다.. 이곳은 이덕창(1569∼1616) 선생의 집으로 조선 선조 때 지은 것이라는데 선생은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내자시정이 된 학자라고 한다.. 본채와 사당, 대문채 3동이 남향하여 놓여 있고 ㅁ자형의 안채와 서쪽에 위치한 사랑채가 본채를 이루는데, 안채에는 원래 6칸 대청이 있었으나 후에 4칸으로 줄이면서 방으로 바꾸었다고 하며 조선 중기 건축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건축물로 건축사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된다.. 탐방일자 : 2016/11/08

문경 조령 관문 중 첫 번째..주흘관..(9)

주흘관.. 사적 제147호로 지정된 문경 조령 관문 중 첫 번째 관문으로 임진왜란 이후 관문 설치의 필요성에 따라 많은 논란 끝에 1708년(숙종 34년)에 석성과 함께 세워졌고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기와지붕이며 좌우에 협문이 각각 1개씩 있다.. 중앙에 높이 3.6m, 너비 3.4m, 길이 5.4m의 홍예문이 있으며 좌우에 높이 4.5m, 폭 3.4m, 길이 188m의 석성이다.. 개울물을 흘려보내는 수구문이 있으며 뒤편에는 영남제일관이라는 현판이 걸려있고 3개의 관문 중 가장 옛 모습을 지니고 있다.. 자료 : 주흘산 주흘관 [主屹山 主屹關] (두산백과) 개울물을 흘려보내는 수구문.. 탐방일자 : 2016/11/08

오래된 설촌 역사를 자랑하는 성읍민속마을..(15)

성읍민속마을.. 제주 모구리야영장에서 1박하고 표선해비치해변을 들러보러 가던 중 성읍민속마을을 지나치게 되어 시간관계로 전체를 돌아보진 못하고 마을의 일부만 탐방했는데 주민들이 거주하고있는 마을이었는데 성읍마을 배치도에 표시된 전체지역 탐방은 다른 날로 하루정도 답사해야 할것 같다.. 제주도 중산간 마을 중 매우 오래된 설촌 역사를 자랑하는 성읍마을의 역사에도 다양한 주민들의 역사가 층층이 누적되어 있었는데 조선조 태종 10년(1410년) 성산읍 고성리에 정의현청이 조선조 세종 5년(1423년) 이곳으로 옮겨진 이래 500여 년간 현청 소재지였던 유서 깊은 마을이라고 한다.. 탐방일자 : 2016/10/16

국채보상운동의 중심! 서상돈고택..(11)

서상돈(徐相敦, 1851~1913)은 조선 말기의 기업인이자 관료였고 민족 독립운동가였다.. 대구에서 지물 행상과 포목상으로 성공한 인물로, 정부의 검세관이 되어 조세곡을 관리하기도 하였다.. 1907년 정부가 일본에 빚을 많이 져 국권을 상실한다고 생각하여 대구 광문사 사장인 김광제와 함께 금연으로 나라의 빚을 갚자는 국채보상운동을 벌였다고.. 자료 : 서상돈 고택 (대한민국 구석구석, 한국관광공사) 탐방일자 : 2016/11/10

민족저항 시인! 이상화고택..(13)

이상화(李相和, 1901 ~1943)의 대구 계산동 2가 84번지에 위치한 고택은 항일문학가 이상화 시인이 1939년부터 작고하던 1943년까지 거하던 곳.. 암울했던 일제강점기에 민족의 광복을 위해 저항정신의 횃불을 밝힌 시인 이상화선생의 시향이 남아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 고택은 암울한 시대를 살면서 일제에 저항한 민족시인 이상화의 정신을 기리고 후손에게 선생의 드높은 우국정신과 문학적 업적을 계승하는 교육의 장으로 활용된다. 자료 : 이상화 고택 (대한민국 구석구석, 한국관광공사) 탐방일자 : 2016/11/10

제주 항파두리 항몽유적지..(11)

항파두리 항몽유적지.. 그 옛날 삼별초의 마지막 보루인 항파두성이 있던 곳으로 700여 년 전에 몽골의 침략군을 물리치고 조국을 지키기 위해 궐기했던 삼별초가 최후까지 항쟁하다 장렬하게 순의한 곳.. 삼별초는 고려군의 정예 별동대로서 고려 원종 11년(1270) 2월 고려 조정이 몽골군과 강화를 맺고 피난지의 임시 수도 강도(지금의 강화도)로부터 개경으로 환도하게 되자 이에 반대하고 끝까지 싸워 우리나라로부터 완전히 몽골의 세력을 몰아낼 것을 주장하여 독자적으로 반몽항쟁을 계속하였다.. 몽골 세력이 이를 토벌하기 시작하자 삼별초는 전라도 진도로 근거지를 옮겼다가 그곳에서 크게 패하자 이번에는 제주도로 건너와 항파두리성을 쌓고 몽골군과 대결하기 2년여 만에 마침내 원종 14년(1273) 4월 몽골 세력에 ..

제주 행정의 중심지! 제주목 관아..(28)

제주목관아.. 관덕정을 포함하는 주변 일대에 자리하고 있었으며 주요 관아시설이 있었던 곳을 말하는데 탐라국 이래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제주 행정의 중추 역할을 해왔던 제주목관아지를 1991년부터 1998년까지 4차례 발굴조사한 결과 문헌상에 나타나는 중심건물인 홍화각(弘化閣), 연희각(延羲閣), 우연당(友蓮堂), 귤림당(橘林堂), 영주협당(瀛洲協堂) 등 30여채의 건물의 흔적이 확인되었고 지난 1993. 3. 30일과 2003. 7. 6일 2회에 걸쳐 주변토지 45필지 22,391평방미터(6,773평)가 국가 사적지 제380호로 지정되었다.. 장장 10여년간의 발굴조사 끝인 지난 2002년 12월 1차 복원공사가 완료되어 홍화각, 연희각, 외대문 등 8동의 건물이 복원되어 전국에서 복원된 유일한 조선시대..